1. 밥
우리나라의 대표 주식인 밥은 쌀이나 쌀과 비슷한 곡물에 물을 부어 충분히 가열해서 호화 시킨 것입니다. 쌀의 품종이나 건조 정도, 밥 짓는 분량에 따라 물의 양을 잘 조절해야 하고, 불의 세기나 밥을 짓는 용구, 연료 등에 의해서도 밥맛이 달라집니다. 밥은 쌀로만 지은 흰밥과 콩, 조, 팥, 보리, 수수 등을 쌀과 섞어서 지은 잡곡밥, 채소나 어패류, 육류 등을 넣어 지은 별미 밥,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장국밥, 콩나물국밥, 밥 위에 나물과 고기 등을 얹어 골고루 비벼 먹는 비빔밥 등이 있습니다.
밥을 짓는 방법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자면 쌀을 잘 씻어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 물에 불렸다가 물기를 제거한 다음, 적당량의 물을 붓고, 불을 조절하여 짓습니다. 이때 물의 양은 보통 쌀 무게의 1.3~1.5배, 쌀의 부피로 하자면 1.2배 정도이며, 햅쌀인 경우 쌀 부피의 10~1.1배 정도의 물을 붓고 짓습니다.
현재는 기본적으로 흰밥을 먹거나 건강을 생각해 현미나 보리를 섞은 잡곡밥을 먹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흰밥이 귀했기 때문에 평소에는 보리나 조 등으로 지은 잡곡밥을 먹다가 제사와 같은 특별한 행사 때에는 어렵게 구한 입쌀로 흰밥을 지어 제사상에 올렸습니다.
밥을 부르는 말은 먹는 이에 따라서 진지, 수라, 메 등으로 달라집니다. 어른에게는 '밥 드세요' 대신 '진지 잡수세요'라고 말하며, 궁중에서는 임금에게 '수라'라고 하며, 제사 때는 조상에게 '메를 올린다'고 합니다. 이때 '수라'는 궁중 용어지만 우리나라의 고유 말이 아니라 고려시대 때 몽골에서 들어온 말이라고 합니다.
- 쌀의 역사
쌀은 저습의 늪지대에 자생하는 열대 식물로, 쌀을 처음으로 재배하게 된 곳이 중국의 윈난성에서 인도의 아삼 지방으로 걸쳐지는 열대나 아열대의 고원 지역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 넓은 지대에서 방사형으로 아시아 각각의 지역으로 쌀이 전파되어 나갔고, 그중에서 하나의 경로는 양쯔강 하류로 나갔다가 다시 북으로 올라가 황하 유역으로 퍼졌으며, 다시 동으로 꺾어져 우리나라로 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에는 쌀보다 기장이나 수수, 피, 조 등의 작물을 먼저 먹었고, 부족 국가 시대로 오면서 쌀을 재배하였습니다. 지형을 보면 밭농사가 적합한 북쪽의 산간 지역보다는 남쪽의 평평한 지대가 벼농사에 적합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낙동강 하류 지역의 기름진 평야를 가진 가야에서는 벼농사가 발달했고 철제 농기구를 이용하여 농업이 발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쌀을 주식으로 즐길 수 있는 계급은 귀족이나 왕족들이었고 서민들은 여전히 잡곡이나 야생 식품을 먹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쌀의 생산은 백제, 신라 때 국가적 규모로 장려되었는데, 조선의 실학자 박제가가 쓴 '북학의'를 보면 삼국 시대까지도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고구려에서는 벼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고 하며, 북쪽 지역에서 가장 먼저 벼농사를 지은 곳은 신라에 속한 강릉 회양 지방이었고, 북쪽 지역의 벼농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퍼졌다고 합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곡물 중에서 쌀이 가장 많이 소비되고 쌀의 생산도 크게 늘었으나 일반 백성들 모두가 쌀을 주식으로 삼기에는 매우 부족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쌀의 재배법을 개량하였고 경지 면적을 확대하였으며, 쌀을 보관하기 위한 쌀 창고를 증설하였고 수리를 강화하는 등의 쌀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쌀을 화폐로 사용한 때가 있을 정도로 쌀 생산량이 많이 증가하였고, 인구수가 늘고 쌀의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쌀의 생산은 더욱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앙법 즉, 모내기법은 못자리에서 모를 어느 정도 키운 다음 그 모를 논으로 옮겨 심는 재배 방법으로 조선시대 전기 때 일부 남쪽 지역에 먼저 보급되었습니다. 가뭄에 약하다는 이유로 정부에서는 모내기법을 금지했지만, 노동력이 적게 들면서 수확량은 두 배로 증가하는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선호하였으며, 저수지나 보를 만들어 가뭄을 극복하여 조선시대 후기에는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였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양반이나 부자들은 쌀을 주식으로 먹었지만, 가난한 농민들은 쌀을 생산해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일반 농민들은 나라에 쌀을 세금으로 내야만 했고,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다른 곡물에 비해 비싼 쌀을 팔아 더 싸고 양이 많은 잡곡으로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재배 방법도 발전하고 생산량도 증가했지만, 여전히 일반 백성들은 보리나 잡곡을 주로 먹었으며, 가난한 집에서는 시래기로 죽을 끓여 먹거나 나물로 겨우 배를 채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임원십육지에 쓰인 63가지의 떡과 39가지의 죽의 종류에 대해 기록된 것을 보면 일반 백성과 양반의 음식이 얼마나 차이가 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을 자국의 식량 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한 산미 증식 계획 정책 추진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쌀은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국내에서는 쌀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나빠진 식량 사정으로 인해 1년 동안 비축할 식량이 없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절에 따라 주식을 바꿔야만 했고, 보리가 수확되어 보리밥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견디고 넘긴다는 말의 보릿고개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이런 상황은 1960년대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
현재는 우리나라는 육류나 밀가루의 소비가 증가하고 쌀밥의 소비가 줄어드는 등 식문화가 바뀌었습니다. 쌀이 귀할 때는 흰쌀밥을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면 이제는 건강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잡곡에 대한 관심이 늘었고 인식 또한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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